그러고 보면 각자의 개성 차이도 아니다. 직장 상사의 성격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우연찮게 거머쥔 각자의 직업에 의해 변해갈 것이다. 농사 짓는 녀석은 농사꾼다운 차림과 생각으로, 직장인은 직장인다운 생활과 의식으로, 그 기미는 이미 미세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p45
그때마다 규진이 자꾸, 뭔가 진지하고 통일된 이야기를 하자고 맥을 끊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대화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잡답만큼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도 없다. 규진은 주량보다도 결혼에 대한 고민 때문에 일찍 취해 버린 것이고, 영표는 아내몰래 연애하는 중인 것 같고, 성일은 주식을 투자해서 상당한 손해를 본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취중에도, 관찰하고 분석하기 좋아하는 시간 강사의 전형이 되어버렸다.. p47
분화구
스테이크와 함께 맥주를 시켰다. 어쩌면, 하고 나는 다시 생각을 이어 나갔다. 서른을 넘긴 평범한 인생이란, 시나리오는 이미 다 씌어져 있고 다만 배역을 캐스팅하는 일만 남은 나이인지 모른다. 그녀 말대로, 그것이 비록 뻔히 내다보이는 상투적 레퍼토리일지라도 배역이 누구냐에 따라 재미가 달라질지 모른다는 기대만 남아서, 이렇게 만나보고 있는 건지도.p57
탤런트
"더구나 사람들은 거의 같은 취향을 저마다 반복해. 가령 똑같은 뉴스, 연속극과 유머 시리즈, 연속극과 유머 시리즈. 엇비슷한 까페와 음악, 베스트셀러와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들을 동시에 보고 있지. 애인을 갈아치워 봐도 다들 비슷비슷해서 다만 위치만 다른 체인점에 들어가 앉아 있는 기분이라구."p80
"내 생각엔 한 사람의 개성이란, 각각의 사소한 차이점들의 조합인 것 같아.. 중략... 이러한 조합은 거의 무한에 가까우므로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미세하게나마 서로 다른 사람인거야."
" 바로 그거야. 그렇게 각자의 차이점이 고작 몇몇 유행의 조합에 불과하기 떄문에 결국 배우자를 선택할 때 가장 중시되는 것은 돈이지. 우리나라 같은 경제 구조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돈이니까, 같은 값이면 돈 많은 상태를 택하지 않겠어? "
"돈 많은 신부감을 원해?"
"아니"
"그럼?"
"돈 많고 예쁘고 똑똑하고 착하고." p82
"하긴 친구들 결혼 생활 보면 다 고만고만한 걱정에 즐거움에 갇혀서 살아. 그들이야말로 마치 체인점 차린 것 같다니까. 그렇다니까! 그건 내면 연기가 전혀 필요없는 얼굴만 어느 정도 예쁘면 누구나 조잘대며 할 수 있는 우리 나라 연속극 수준밖에 안 돼." p89
안락의자
"우리 회사 사람들이 결혼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내린 결론인데, 사람들이 하필 그전에 사랑한 사람이나 그후에 사랑할 사람이 아니, 바로 지금의 그 사람이랑 결혼하게 되는 건 단지, 그 사람을 결혼 적령기에 만났기 때문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누구를 만나 사랑해도 상관없는데 단지 순서가 문제인 거지. 그중에서 제일 괜찮은 남자를 바로 결혼 적령기 때 만나야 행복해질 수 있는 거니까." p114
우주선
"죽은 뒤에까지도 헤어진 사람과 다시 만날 루트가 없다는 말은 너무 슬프다."은희가 중얼거렸다.
"그렇지 만도 않아요 요즘은 서로 좋아하면서도 헤어지고 나니까." 광훈이 말했다 "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더래요."
" 이별이 슬프기만 한 시대는 지났지." 내가 말했다. "죽어서도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쓸쓸한 두려움과 그러나 그 바람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날지 모른다는 즐거운 기대가 이별 뒤에는 언제나 동시에 놓여 있거든." p126
서른세 살
"나 사랑해?"
"응."
"거짓말"
"사랑은 세상에서 신축성이 가장 뛰어난 고무줄일 뿐이야.
"고무줄?"
"사랑이란 단어의 개념망이 너무 넓다는 뜻이야 . 사랑은 누가 복음 13장 1절에 나오는 의미로부터 결혼해 달라는 뜻이거나 단지 함께 섹스하자는 뜻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이어령비어령이지뭐" p159
예언
"타락을 막아주는 건 양심이나 도덕성이 아니라. 자기 일이야." p174
앵무새
"감정대로 사는 사람에겐 감정이 더 중요하다는 나름의 이론이 세워져 있는 거라고 봐야 해. 이론은 누구에게나 다만 개똥철학 같은 형태로라도 갖고 하는 필수적인 거야."p187
"인생이란게 그런 건지 몰라. 길을 계속 가다 보면 처음 의도와는 다른 결실을 얻기도 하지. 특히 남녀 관계에는,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딱히 정해진 규율이란 게 없으니까....." p195
보물
"책들을 보니까 마치 너의 뇌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야. 네가 하는 말은 거의 다 여기 있는 책들의 어느 한 문장에서 따온 거지? 그래서 책 많이 읽은 사람들은 본심을 알 수가 없어. 온통 남의 관점뿐이지. 아마 자기 자신조차도 자기 본심을 모를 거야. 그치?" p201
콩나물비빔밥
"일단 헤어지면." 침을 삼키고 말했다.
"잊든 잊지 못하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어. 잊을 수 없을 땐 잊어야겠다는 의지로, 다른 여자를 찾을 테니까."
"후----". 그녀가 긴 한숨을 소리내어 뱉었다. 그리고 그 한숨보다도 나지막하게 마치. 자기 자신에게 대고 말하듯 중얼거렸다.
"하긴 나도 그럴 거야" p227
채널
우리는 환상과 실제를 혼동하기는커녕, 꿈과 현실을 구분짓지 못하기는커녕, 하나의 현실 속에 다차원적인 세계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치 텔레비전의 채널처럼, 다양한 삶의 양식이 서로 어긋나는 삶의 공식들이 하나의 세계에 공존하고 있으며,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나 슬픔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것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다만 채널을 돌려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을 너무나 또한 잘 알고 있다. p234
몇십일 자고 나면 어엿한 스물 여섯 살이 되는데 오마이갓, 부모님까라 상사님마데 벌써부터 결혼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빈도가 늘어가고 있다. 도대체 결혼 적령기라는게 뭔가? 나이에 맞춰 학교 가듯이 결혼도 정해진 나이에 해야하는가? 자의던 타의에 의해 만난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해야한다면 몇 년은 살아보고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 결혼은 그야말로 현실인지라 저지르고 순응해가는거라고? 그런데 왜 그런 현실의 구덩이에 밀어 넣으려고 벌써부터 닥달들이신지. 결혼을 본인들의 과업이라고 생각하시는 건지. 난 어른이 되면 처녀 총각들한테 어서 시집장가가야지 따위의 말은 절대 안 해야지.
아직 결혼식을 많이 가보진 않았지만, 결혼을 하는 커플에게는 항상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 보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난 하얀 웨딩드레스가 뭇여성들에게 결혼을 하면 마치 공주가 되고, 결혼이 정말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환상을 갖게 하는 껍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결혼할때 절대 하얀 드레스를 입고 결혼하기가 싫다. 빨간 드레스를 입던가 아님 한복을 입던가.
해외에 출장다니는 커리어 우먼이되겠다는 나의 어릴 적 환상을 이루고 나니 환상과 현실의 갭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름 어릴 적 부터 상상해 온 나의 결혼에 대한 환상이 깨질 것이 두려워서 벌써부터 그 환상을 깨려는 작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때는 마흔 살인것 같다. 아이리스에 나오는 이병헌과 정준호도 마흔 살인데 멋있지 않은가? 2024년 9월 17일 내 생일 케이크에 꽂힌 길다란 4개의 초에 불이 붙었을 때, 내 스스로 감격할 것 같다. 홍연우, 사십 년 동안 사느라 참 고생 많았고 기특하다고..... 일찍이 마흔 살에 빛날 것 같은 어린 남자를 만난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런 사람을 못 만난다면 마흔에 임박한 아저씨를 만나야 하나.. 음... 아니면 마흔 살에 블링 블링 빛나는 골드 미쓰가 되던가...
댓글을 달아 주세요